“ 구원이란 무엇인가 ”
구원이란 무엇인가
1. 시작하며
2. 이 시대가 생각하는 구원
2.1. 웰빙 = 구원
“죄에서 해방되는 것”, “이 세상/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주장하면 구시대의 사람으로 취급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시대가 생각하는 구원이란 “풍요”, 이른바 “웰빙”의 삶이다. “웰빙”의 삶은 지금의 고난(?)을 감내하게 하는 “복음”이다. “웰빙”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2004년의 사람들은,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처럼 자신이 가진 자원으로 풍요를 누리려고 애쓴다.
2.2. 영생을 꿈꾸는 사람들
웰빙은 건강과 직결되어 사람들은 “건강”을 숭배하고 있다. 건강과 관련하여 심각한 상황은 “죽음을 잊어간다”는 현실이다. 이제 사람들은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복제” 등을 통해서 “영생”을 추구한다. 과학자들이 영생을 줄 수 있다고 사람들은 기대한다. 과학을 수단으로 육신의 영생을 추구하는 종교단체는 인간복제야 말로 영생의 복음이라고 확신한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데에 인생의 가치를 부여하다 보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구시대의 고민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2.3. 인간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 “인간이 구세주/창조주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 자신이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조정하고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부터 현대의 비극은 심화되고 인간성은 상실되고 있는 현실을 모르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시각에서는 인간은 실험 대상이 될 수 있다(유물론적인 인간관). 얼마나 사회적 이득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관점에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경제적/공리주의적 인간관).
2.4. 비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인간을 바로 보게 하는 잣대
2.4.2. 죽음은 잊을 대상이 아니라 기억의 대상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는 존재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교회가 웰빙의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웰빙을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는 어휘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마치 교회의 주요 기능이 웰빙을 채워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죄/죽음에서부터 해방”이라는 기본 진리를 망각해 가는 모습은 교회가 복지 기관이나 기업처럼 변하고 있지는 않은가, 반문하게 한다.
3.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3.1. 구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구원”은 구원을 받아야 할 상태인 “타락”을 전제한다. “타락”은 타락 전의 “좋은” 상태를 전제한다. 처음에는 좋은 상태였지만 어떠한 이유로 잘못되었고, 이 잘못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타락” 전의 “창조”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구원의 전의 타락을, 타락 전의 창조 곧 “좋음”의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은 태초의 창조를 “좋았더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선하며 그 목적을 위해 살아야 인간의 존재 의미가 성립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목적을 벗어나서 살게 될 때 그 상태는 “죄”가 된다. 죄의 시작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존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왜곡된 상태에서 “좋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회복되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회복되는 길은 창조주 하나님의 새롭게 하심에 달려 있다.
*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은 "다스림"과 관련된다. 하나님의 속성은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것이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의 속성/기능 역시 다스림이다. 왕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해서 시편 8편은 인간이 존귀로운 왕관을 썼다고 한다.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에 형상은 다스림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이 왕이라고 하며, 요한계시록에서 주의 백성들은 왕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왕의 형상을 가졌고 그 기능을 행하고 있으나, 하나님(하늘 왕)께 의존하도록 요구된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를 따라 선악을 분별하는 왕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불행으로 가는 길이다.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은 왕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으나,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면 다시 왕의 존귀를 회복하게 된다. 그러기에 구원/회복은 참으로 아름답고 존귀한 이름인 것이다.
1) Dominion: Kingship and Kinship (Covenant Relationship)
2) Dependence on God ⇔ Self Assertive Will
3.2. “아버지와 아들”의 그림언어에 나타난 구원
3.2.1. 타락: 아버지를 떠남
① 탕자=아담=인간
“탕자는 첫째로는 아담을 가리키고 이차적으로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탕자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의 재현이다. 아담은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탕자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 죽음의 상황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탕자의 비유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비유다.” (김세윤)
② 탕자/아담의 죄: “자기 주장 의지”
창조 목적을 잃어버린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올바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잃어버렸기에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려고 한다. 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는가? 이는 인간의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Self assertive will)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를 주장한다는 의미는 자기가 갖고 있는 자원으로 살아보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상태를 말한다. 탕자의 이런 “독립 요구”는 아버지의 권세를 자신의 권세로 만들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아담이 보인 자기 주장 의지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주가 되어 뜻대로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온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③ 자기 주장의 결과는 절망과 죽음
자기를 주장하는 것도 죄가 되지만, 자기를 주장하면서 남기는 삶의 결과 역시 “죄의 열매들”이다. 죄의 열매들은 암세포가 확산되는 것처럼 결국 인생을 죽음으로 내몬다. 결국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주장하며 살아가는 삶의 종국은 “죽음”이다. 탕자가 이방인의 종이 된 상황,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짐승인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된 상황, 돼지의 음식 조차도 먹을 수 없는 존재가 된 상황은 “죽음”을 가리킨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24,32). 인간은 자기가 가진 자원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자원을 뺏어낸 탕자처럼 다른 사람의 자원을 뺏는다. 다른 사람들을 항복시켜서 행복을 추구한다. 하나님과의 갈등은 끝내 동료 인간들로부터도 소외시키고 그들과도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④ 왜 탕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옳지 않은 태도다. 피조물로서 가져야 하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과 같은 태도를 취한 것이 죄다. 인간은 자기 의지와 힘으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존재다. 그런데 창조주를 거부한다는 것은 스스로 호흡을 끊겠다는 뜻이다. 스스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인생은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다. 뿌리 뽑힌 나무가 보여주는 증상은 죽음이라는 병에 걸린 인생이 보여주는 증상과 같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무한한 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아 그 자원에 의존하여 살 수 있는 존재였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안에서 행복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오는 통로를 끊어버린 결과 인간은 자기 속에 내재한 극도로 제한된 자원에 갇히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길어야 100년이라는 제한된 시간, 영원에 비하면 순간에 불과한 시간을 살아간다. 자원의 공급마저 떨어져 그 짧은 인생 동안 한 시간 후 무슨 일이 일어나들 그 모두를 해결할 수 없는 제한된 힘과 이웃에 대한 극히 제한된 사랑 등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다.”
3.2.2. 구원: 부자 관계를 회복
구원은 아버지인 창조주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근거는 찾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어떻게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는가?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심” 때문이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탕자가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게 된 것은 오직 아버지의 주권에 달린 문제였다. 잃어버린 바 된 사람이 스스로 아버지를 찾아 오지 않았다. 찾고 회복시킨 쪽은 아버지다. 누가복음 15장에 연이어 나오는 “잃어버린 자들”은 “세리와 창기들”과 같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간주되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하심”에 근거한다. 둘째 아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여 돌아왔는지, 자기의 먹을 것이 없고 이대로 살다가는 죽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돌아왔는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아들의 돌아오게 된 동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신 마음이 아들을 회복시켰다.
4. 구원은 어떻게 오는가
4.1. 구원, 오직 은총으로 온다
우리가 가진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원 제한에서 생기는 악과 고난의 문제를 제한된 인간의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내재된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에 있고 우주 밖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우리 밖의 무한한 힘을 가진 초월자로부터 우리를 위해 오는 것이어야만 즉 ‘오직 은혜’로 올 때 우리 인간에게 구원이 이루어진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주권을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자신을 맡긴다. 그가 얻게 된 것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다. 하나님께 자신을 던지는 의존은 참 자유를 준다. 모든 자원을 가진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한, 아들은 이 아버지 안에서 안식을 얻는다.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아빠 노릇해 주심을 믿어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용서와 잔치는 바로 나를 위한 풍요로운 잔치가 되는 것이다.
4.2. 은총, 예수님의 희생에서 온다
인간의 문제는 창조주만이 해결하실 수 있으므로 창조주께서 만드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방법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길이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언약을 맺으신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마 1:23). 요한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 땅에 텐트를 치고 오셔서 하늘을 보여주신 사건으로 보며, 이를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줄 때 유대인들은 “영광”을 보았다고 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고난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기 때문에 “영광”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데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선언한다.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높이셨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5-17)
4.3. 구원에 있어서 기독교의 유일성
4.3.1. 그리스도의 성육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의 허물 때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 이사야 53:6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람들은 눈이 먼 양들과 같아서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죽은 것을 알지 못한다. 양들은 목자가 자기를 대신해서 늑대와 싸워 피를 흘려도 관심이 없다. 늑대가 무서워서 도망가기 바쁘다. 하나님은 인간을 잘 아시기에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님 한 사람에게 담당시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담당한 “어린 양”으로 오신 것이다. 어린 양, 예수님의 고독한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세상의 모든 죄를 홀로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지목된다. 예수님은 죄인도 아니요 이방인도 아닌데도 세례를 받는다. 세례로써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된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선언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모습으로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이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님은 세상 죄를 없애려고 고독하게 걸어가는 어린 양이 되신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던 날 밤은 “유월절”이었다. 그날 밤,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장남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어린 양들이 피 흘려 죽는다. 어린 양이 죽음으로 생명이 살아난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 피를 믿는 모든 사람이 살아난다.
4.3.2. 언약의 피: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익한 길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면 신명기 말씀대로 나무에 달려 죽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저주 받은 사람이 된다(신 21:23). 처음부터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방법이었기에 인간의 지혜로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식으로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도 없다. 죄와 죽음의 문제는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렇기 때문에 죄와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유일성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속에 있다. 죄와 죽음의 문제에서 성경만이 유일한 구원 진리를 선언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구원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넓은 개념을 갖고 있다.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구원의 확신과 확신의 삶
5.1. 2% 부족한 현실과 구원의 확신
기독교의 이름으로 “구원”과 “복음”을 말하면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와 같은 이단은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정통 기독교의 구원은 2% 부족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2% 부족한 부분을 율법으로 채운다. 도덕을 폐기하는 방식으로 구원의 감격을 채운다. 갈라디아 교회에도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형제”의 이름으로 들어와 율법과 할례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가르쳐 구원관을 흔들기 시작했다. 할례와 율법은 유대인의 자긍심을 나타내 주는 상징이었지만, 바울이 볼 때 “할례”와 “율법”은 “종의 멍에”였다(갈 5:2-4). 구원받은 사람들의 현실은 2%, 아니 모든 삶이 부족해 보여도 구원은 “이미” 온 것이요,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다 (Already, but not yet).
5.2. 구원의 확신과 자유
5.2.1. 믿음과 자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은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데 있다. “자유를 주셨다”는 “건지셨다”(갈 1:4), “속량하셨다”(3:13; 4:5)와 연결된다. 바울은 갈 1:4에서 그리스도께서 “오늘의 악한 세상 질서에서 우리를 구출하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 기독교인은 믿음을 가지는 순간 “자유의 백성”으로 이미 신분의 변화를 경험한다. 기독교인은 자유의 백성이요 의롭게 된 성도들이다. 하나님의 새 백성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신분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존재가 변화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아들로 존재가 변화되었기에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 바울서신에서 주장하는 “존재변화”에 대한 예들은 다음과 같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장);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7-28);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6-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5.2.2. 세상 질서에서 자유
오늘의 세상 질서는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속성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의 악한 질서를 따라 살아가던, 사실은 죽어가던, 갈라디아 성도들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참 자유다. 비록 과거 습성을 따라 세상의 악한 질서가 주는 유혹에 빠지더라도 자유한 신분을 불신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은 이미 자유를 가진 자들이요 비록 지금 마음이 흔들려도 자유한 백성들이다. 이 자유를 끊을 자 없다!
5.2.3. 운명주의에서 자유
안타깝게도 기독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운명을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진정으로 “보배로운” 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운명의 종국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에서 해방한 크리스천에게 왜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사슬을 들이대는가. 기독교인의 건강한 세계관이 요청된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5.2.4. 피조물에게서 자유
예수님의 구원을 인간 관계에 적용해 보자.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부르심의 확신이 있을수록 자유를 소중히 여기게 된다. 자유를 아는 기독교인은 육체의 유익을 위해서 얻는 자유를 마음대로 쓰지 않는다. 자유 속에 의무감이 있음을 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
5.3. 구원의 확신과 긴장성: “이미 그러나 아직”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여러 사슬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으나, 구원의 완성은 남아 있다. ‘남아 있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얻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은 ‘성화’라는 과정에 놓이게 된다. 기독교인은 구원을 받았으나 완성된 것은 아니기에 이 과정에서 갈등이 생긴다.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도 변화되었으나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으므로 사랑도 나오지만 미움도 쏟아진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했을 때, 이미 연합군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승리를 결정하는 그 날을 D-day라고 한다. 그러나 승리의 날(V-day)은 반드시 올 것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 독일군이 완전히 멸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싸움이 있다. 이처럼 “이미” 구원은 이루어졌지만 “아직은” 남아 있다(alreay ~ but not yet).
성경은 구원이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그림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구원이 임했으나 아직 완성은 아니라는 점은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임한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함께 이미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긴장감이 생긴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누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인가? 혹시 자기 확신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이 아닐 수 있지 않은가? 마태복음 22:1-14의 비유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 곧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구원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5.4. 구원과 삶: 존재와 실존
5.4.1. 세상의 소금과 빛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다. 소금과 소금맛은 분리될 수 없다. 소금맛이 나지 않으면 소금이 아니다. 등불이 피어있다고 하면서 빛을 내지 않는다면 등불이 아니다. 소금 맛을 내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기에 소금 맛을 낼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신자에게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책망하신다. 변화된 사람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하고 성령님께서 힘을 주시도록 기도한다. 그러나 도저히 존재에 맞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는 죄를 반복하여 행한다면 교회는 그 사람이 존재의 변화를 확인하는 기회를 주기 위해 ‘권징’을 행한다. 신분에 맞지 않게 행동하기 때문에 책망하는 의미로 권징을 시행한다.
5.4.2. 좋은 밭과 열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선한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다.
5.4.3. 믿음과 사랑: 하나님 나라 백성과 합당한 삶
기독교인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간다. 갈라디아서 5:6의 “역사하다”는 “일하다”, “작동하다”, “효과를 내다”, “이루다”는 뜻이다.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 삶으로 나타난 “윤리의 열매”를 가리킨다. 믿음이란 반드시 사랑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예수님은 마태복음 22:1-14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삶’은 ‘예복’이라는 비유어로 나타난다.
6. 맺으며: 하나님의 백성과 전도
1)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온다
2) 은총으로 구원받고, 자연(세상)을 회복한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다고 해서 교회 안에 머물라는 뜻은 아니다. 구원은 “회복”이므로 더듬이의 상처를 입은 세상이 치유되어 본래의 목적을 찾아 가도록 애써야 한다. 자신이 부름받은 그 장소에서 변화된 소금의 존재로서 녹아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일반은총 (Common Grace)과
사회를 보는 교회의 눈
*기독교의 공격적인 전도와 관련하여
3) 비인간적인 시대에 인간되기
그리스도를 통해 바른 방향을 회복한 기독교인들은 오직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만 그 형상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고, 인간을 존중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는 편견을 갖기 보다 그들이 형상을 회복하도록 기도하면서 그들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담긴 하나님의 형상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4)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넘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옳은 이야기지만 예수님을 한 번 믿는 것으로 신앙생활이 끝난 것 같은 오해를 줄 수 있다. “예수 천당”의 신앙을 넘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데 구원의 목적이 맞추어져야 한다.
5)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는 예수 중심의 신앙이어야
신비가 기독교의 목적인가? 은총이 기독교의 목적인가? 예수를 아는 것이 은총이요, 이 은총이 다른 종교의 구원과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름 그대로 예수의 신앙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사는 삶이 진정한 영적 삶이다.
6) 전도인: “아버지처럼”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어제까지 문 밖에 있던 아들은 둘째였다. 이제 큰 아들이 집 안으로 오지 않는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따진다: “보십시오. 나는 여러 해 동안 ‘당신의’ 종으로 지냈고 결코 당신의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신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도 내게 ‘결코’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재산을 창기들과 함께 다 낭비하고 왔을 때,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았네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설득하고 권한다. 15:28의 “권한다”는 단어는 “파라칼레오”라는 동사다. 이 동사가 쓰인 예를 몇 군데 보자: “권한다”는 단어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간구했을 때, “간구하다”는 동사와 같다(눅 8:41).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받은 사람에게 얼마의 빚을 진 사람이 엎드려 조금만 결재일을 연기해 달라고 간구할 때, “간구하다”는 동사와 같다(마 18:29).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제발 이 지방에서 내보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구할 때, “구하다”는 동사와 같다. 이런 예를 보면, 아버지는 마치 종이 된 것처럼 맏아들이 문 안으로 들어오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맏아들을 설득하고 달래고 간절히 호소하고 격려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길 바라는 “아버지”다. 문 밖에 서 있는 큰 아들을 찾아가서 호소한다. 이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사랑에 눈이 먼 아버지!” 구원받은 사람은, 진정으로 구원을 확신한다면, 이 “아버지”를 인격적으로(또는 개인적으로) 알아야만 신앙생활의 행복을 얻는다. 아버지는 종으로 살아가는 큰 아들에게 위에 나타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달라고 호소한다. 만일 큰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이들의 인생목적은 이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처럼 자비한 사람이 되는 길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양들이 돌아오는 것으로 행복해하는 기쁨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리고 교인들이 서로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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