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칼빈의 예정구원론과 자유의지

최민용 2007. 12. 13. 21:21
목          차
   1.자유의지 논쟁
  1.1 머리말
  1.2 자유의 존재
1.2.1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
1.2.2 타락전의 자유의지 존재설
1.2.3 타락 후의 자유의지 존재
  1.3 자유의지와 구원의 은총
1.3.1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
1.3.2 어거스틴의 은총론
1.3.3 반(半,semi) 펠리기우스주의
1.3.4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

    2.예정론
  2.1칼빈의 예정론
2.1.1 칼빈의 예정론의 위치
2.1.2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원한 선택
2.1.2.1.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예정론
2.1.2.2 예정과 예지
2.1.2.3 이중 예정
2.1.2.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2.1.2.5 선택과 구원
2.1.3 하나님의 주권적 이중예정과 인간의 노예의지
2.1.4 선택된 자의 자유
2.1.4.1 선택의 증거의 문제
2.1.4.2 선택된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안에서의 “선택의자유”

    3.결론
  3.1 자유의지논쟁
  3.2 칼빈의 예정론에서의 해석
  3.3 맺으면서

칼빈의 예정구원론과 자유의지

1.자유의지 논쟁
1.1 머리말
자유의지 논쟁이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논의하는 몇가지 논쟁을 말한다.첫째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이 자유의지가 인간의 범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하는 문제이다.마지막은 자유의지가 인간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규명하는 논쟁이다.
자유의지 논쟁은 5세기 경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16세기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 등이 특히 유명하다.오늘날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성경적인 입장은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가운데 하나로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가 범죄에 영향을 주었으되 인간의 타락 후 구원에는 무가치하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입장이다.여기서는 구원문제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미치는 영향(즉 예정론과 자유의지와의 관계를)을 중심한 논쟁을 살펴보기로 하자.
1.2 자유의 존재
1.2.1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
미국 하바드대학의 스키너교수는 인간을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었을 때 시도된 허구의 관념이 인간의 자율성이란 것이며 현대에 와서 이러한 허구성과 날조가 제거됨으로 과학적이고 참다운 인간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원래부터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은 주어지지 않았으며 단지 태어나기 전부터 그에게 주어진 환경의 영향아래 살면서 인간 개개인의 행동이 결정된다고 말한다.1)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간행동의 원리를 환경적 영향에 종속시키는 기계적 인간관은 인간의 책임성 특히 죄책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이러한 인간관을 가진 영미의 행동주의적 철학자들은 “완전한 공이 완전한 수평면에 놓여 있을 때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그 공이 움직이지 않는다.따라서 자유의지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한다.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입장에 선 슐릭은 형벌의 정당성을 설명할 때 인간의 잘못된 자율성 또는 자유의지의 남용에 대한 책임을 묻는 뜻에서가 아니고 환경의 영향에서 계속적인 범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형벌이며 다른이에게 그러한 범죄를 짓지 못하게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2)

1.2.2 타락전의 자유의지 존재설
자유의지에 관한 최초의 논쟁은 412년 이후부터 계속되었다.이 논쟁의 당사자인 어거스틴(345-430)과 펠라기우스(5세기초 로마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수도승)가 공통적으로 인정했던 것이 타락 전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할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voluntas)와 대조하여 인간이 가진 선택의 자유(liberum arbitrium)를 의미한다.즉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는 자기 책임하에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에 대하여 인간은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3)인간 자신이 스스로 행동에 대한 원인이지 환경이나 다른 누구에게 자기 죄의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펠라기우스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부여되어 있었음을 강조하며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선과 악의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인간본성의 연약성에 전가시키는 것을 반대한다.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는 일을 자기들이 선택할 문제이고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의지의 주체인 아담과 화와에게 지워졌다고 한다.4)

1.2.3 타락 후의 자유의지 존재
어거스틴은 타락 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실되었다고 주장한다.죄의 결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이렇게 부패한 상태에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악을 행할 뿐이고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없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인간의지가 본래적 의미에서 일정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행함으로 저급한 수준의 칭찬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5)
펠라기우스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담에게 있었고 이 능력은 타락 후의 아담에게 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손상없이 주어진다고 말한다.이 능력은 아담의 죄로 손상되지도 않았고 마귀에 의해 파괴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마귀의 힘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없을 만큼 마귀의 역사가 강한 것은 아니라 한다.영을 거스리는 육의 힘이 강한 것이 사실이나 육이 영을 지배할 정도는 아님으로 구약의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본다.따라서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이거나 자유의지가 손상되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지의 자유를 남용하기 때문이라 한다.6)
1.3 자유의지와 구원의 은총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인간의 선택과 의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자유의지 존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견해를 비교하며 논쟁의 성격을 살펴보자.

1.3.1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자유의지에 관한 자기 견해를 409년에서 411년 사이에 발표하였다.그의 사상은 제자인 코엘레스티우에 의해 명확하게 정리되어 북아프리카 교회에 전파되었고 어거스틴의 숙명론에 대항하여 자유의지를 강조하게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아담의 자유의지나 그 후손의 자유의지는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고 말한다.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본능의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란 인간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선과 악을 선택하여 행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말한다.7)
이러한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본래적 은총 또는 창조의 은총이다.이러한 자연적인 은총 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계시의 은총을 주시는데 이 은총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통해서 또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주시는 은총이라 한다.이 은총을 사용함으로 사람들은 보다 쉽게 구원의 길을 선택할 수 있으나 이 은총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 한다.
어린이는 태어날 때 원죄에 오염되거나 성품이 부패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세례를 받지 않고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세례가 구원의 방편이거나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오직 세례는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지으려는 습관을 억제하도록하고 자유의지를 바로 사용하여 스스로 새로운 생활을 해나가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없이도 인간의지의 선용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는 여러차례의 종교회의를 통해 논의되고 정죄되었다.펠라기우스의 뛰어난 제자인 코엘레티우스는 412년의 카르타고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파문을 당하였다.
펠라기우스는 416년의 밀레브대회와 카르타고대회를 통해 이단으로 정죄되고 종적으로 431년의 에베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3.2 어거스틴의 은총론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이 그의 엄격한 수도생활과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인격에 기초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그의 철저한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영향을 받고 있다.생애 초기에는 마니교의 숙명론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으나 자기의 회심을 생각할 때 구원에 이른 것이 자기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 것을 발견하고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을 반박하게 되었다.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악하다는 마니교의 주장을 반박하며 어거스틴은 인간이 의지를 선용함을 정욕을 제어할 수 있고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가르쳤다.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아담은 타락 후 악한 의지를 가진 죄인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상실하고 정욕을 제어할 능력도 잃어버렸다고 한ㄷ.
인간의 타락은 아담 뿐만 아니고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를 전적으로 타락하게 했으므로 타락 후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남아있는 의지란 오직 죄를 짓는 타락한 의지뿐이고,하나님을 향해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인간의지가 죄에 예속화됨에 따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이라고 한다.인간의 회복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데 이 은총은 세례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하나님과의 최초의 관계를 맺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에 유아도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이 세례를 통해서 인간의 원죄가 제하여진다고 말한다.8)
인간의지에 미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의 결과로 죄인인 인간이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인간의지는 점점 더 자유롭게 해방되어 더 높은 단계의 선을 행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란 죄된 인간의지에 미치는 감화력으로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1.3.3 반(半,semi) 펠리기우스주의
어거스틴의 은총교리를 그대로 수용하기를 거절하는 움직임이 420년 경부터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일고 있었다.431년의 에베소회의에서 펠라기우스가 정죄를 당하였음에도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전적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어거스틴이 주장하던 절대적 예정론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까지 반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예정교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낙관주의를 심어주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겐 심한 좌절과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어거스틴의 예정론이 가져온 이러한 폐해 때문만이 아니라 프랑스 남부의 고울지방에서 전통적 교회교리에서 벗어나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강하게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반대운동은 크리소스톰의 친구이며 제자인 카시안이 주관하는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대했다.특히 레린스의 빈센트가 반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새로운 입장에 서서 다시 한 세기 동안 계속되는 논쟁을 주도하였디.
그러나 이 새로운 주장을 반 펠라기우스주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왜냐하면 이 새로운 주장은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제외하고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대체로 주장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어거스틴의 예정교리에 반대하는 입장을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부르기 보다는 반어거스틴주의라고 부를 것이 더 합당하다.
수도사로서 자기들의 실상을 고찰할 때 인간심성의 전적인 타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특별히 정욕적 경향성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원죄관에 동의하게 되었다.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인간의지의 예속화,은총의 불가항력성,절대적 예정의 교리에 대하여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교리과 서로 다름을 발견하고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도었다.9)
예정론은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피상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고 전도역을 약화시키며,숙명론적인 자포자기와 슬픔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 때문에 반론을 일으켰다.예정(豫定.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예지(豫知,foreknowledge) 즉 예견된 신앙과 순종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일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반 펠라기우스주의의 견해이다.10)
반 펠라기우스주의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타락 이후의 인간의지가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한편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관 즉 자유의지는 완전하여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반대한다.반 펠라기우스주의가 말하는 자유의지론은 타락 이후 인간의 의지는 약화되었고 아담의 죄는 그 후손에게 유전병과 같이 전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지가 타락으로 약화되었으므로 스스로를 자유케 할 수는 없으나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인간은 이 의지의 자유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도움을 받아 구원으로의 첫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고 한다.또한 인간은 소유하고 있는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절할 수도 있다고 한다.11)
이와같이 반 펠라기우스주의는 자유의지의 완전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편 구원으로의 불가항력적 은총을 반대한다.은총은 인간의지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인간이 자기의 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카시안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균형있게 조화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어거스틴의 공로라 할 수 있는 ‘은총으로만’(sola gratia)이라는 귀한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529년경 오렌지회의에서 반 펠라기우스주의가 배격되었으나 어거스틴의 주장이 그대로 수용된 것이 아니다.펠라기우스와 반 펠라기우스주의로 이어지는 논쟁을 통해 어거스틴의 과격한 주장들이 완화되었다.
오렌지회의를 통해 서방교회의 인간론으로 받아들여진 교리는 인간의지는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결정했다.한편 멸망으로의 예정교리가 거절되고 불가항력적 은총의 교리도 채택되지 않았다.12)

1.3.4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쟁이 1,000년이나 지난 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거장인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의 기수인 루터사이에서 일어났다.루터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sola gratia,sola fide를 주장하자 이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고하라는 주변의 요청이 에라스무스(1466-1536)에게 이르렀다.에라스무스는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루터의 인간의지 무능설에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자유의지 논쟁이 다시 일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1524년 <자유의지>라는책을 써서 루터의 주장에 노박을 가했다.즉 루터가 말하는 인간의지가 전혀 무능하다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sola gratia나 sola fide를 주장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약해지고 악을 행하게 하는 위험을 안겨주는 것이므로 이를 글로나 설교로 공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권고하는 내용이였다.
이에 대해 루터는 자기가 주장한 바 연옥설의 반대나 면죄부의 불법성에 대한 교리적 혁신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유독 하나님의 은혜나 인간의지의 노예화를 주장한 것에 대하여 반박하고 나서는 에라스무스를 비난하였다.이렇게 발전한 논쟁은 오늘날 칼빈주의와 웨슬리안 사이에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선행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 논쟁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2.예정론
2.1칼빈의 예정론
2.1.1 칼빈의 예정론의 위치
칼빈의 주 저서인 기독교 강요에서 그가 예정교리를 다룬 순서 내지 구조를 놓고 칼빈에 있어서 예정교리는 단순한 논리적 귀결점 정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칼빈은 기독교 강요 마지막판 제 3권에서 이신칭의,회개,성화,기도 다음에 예정교리를 다룸으로서 결국 논리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예정 내지는 선택의 은혜에 의하여 이신칭의,회개,성화가 이루어 진다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또한 칼빈의 예정교리는 그의 목회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제네바 요리문답(1537년)에서 밝히고 있다.이처럼 칼빈에 있어서 예정교리의 위치는 하나님의 은총 및 구원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방편이나 논리적 귀결이 아니고 칼빈의 신학체계에 있어서 적어도 구원론에 관한 그 핵심을 이루는 겨리임에 분명한 것 같다.

2.1.2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원한 선택
2.1.2.1.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예정론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원한 선택을 알지 전에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에서 온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13)따라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자취에 대하여 바울이 언급해 준 것은 하나님께서 선한 기쁨에서 이 일을 하신 것이지 보상으로 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원한 선택을 밝히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겸허한 자세를 취할 수 없다고 칼빈은 말한다.그는 예정교리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겸손과 함께 감사를 드리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다.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하나님의 참되고 깊으신 신에의 계시,죄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은총의 신비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14)또한 칼빈은 예정론을 은총의 범위에서 다루고 있다.나아가 칼빈은 예정교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에 근거한 것이지 인간에게서 어떠한 것도 전제하지 않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예정과 예지를 구분한다.

2.1.2.2 예정과 예지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도 아니며,또한 우리가 미래에 거룩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지 때문에 선택한 것도 아니다.칼빈은 과거나 미래의 어떤 요서가 예정의 조건이 되려고 하는 것을 거부한다.예정은 창조 이전에 된 공적의 예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창조 이전의 선택이고 공적의 예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15)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미리 택하셨습니다.그리하여 우리를 그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사랑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미리 정하셨음이니라(엡 1:4-5,골1:22).
예지가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가 된 것이 아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롬 9:15)라고 하셨다.그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는 그들을 축복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그것을 그의 자비에서만 취하신다는 하나님의 명백한 선언이다.16)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 자신 안에서만 세운다.“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샘에서 나온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는 어거스틴의 말은 확실히 명언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선택되지 않으면 거부를 포함한다.“거부도 행위의 근거 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난다.17) 칼빈에 의하며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과 거부된 자의 거부를 다만 허락한 것만이 아니라 권하셨다.그러나 동시에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인간이 거기에 속해 있는 비극을 경험하도록 창도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고 인간자신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예지란 과거와 현재를 한 눈에 현재의 일로 파악하는 하나님의 지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예정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각인에게 되어지기를 원하는 것을 미리 결정하시는 의지의 결단을 말하는 것이다.예정은 예지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칼빈은 창조 이전의 선택을 말하는 데 이것은 인간의 공로를 예지한 결과로 되어진 선택이 아니다.선택은 공로의 예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관적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선택은 인간적인 가치나 공로와는 하등 관계가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한다.

2.1.2.3 이중 예정
칼빈의 예정론은 선택되지 않은 자,즉 거부되고 포기된 자의 예정 즉 이중 예정을 말한다.칼빈은 거부도 업적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말한다.그리스도가 우리 중의 일부를 거부된 자로 남기시는 것은 그가 그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할 만큼 약하기 때문이 아니고 이렇게 인간들을 구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강한 팔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18)
이중예정은 하나님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라고 본다.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심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공의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같이 멸망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그러나 모두를 버려두지 않고 은혜로써 선택함으로 그의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다.이것은 하나님의 결단이다.하나님의 결단은 그의 공의로운 심판속에 숨어있다.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질문속에 종속되지 않는다.비록 주께서 죽음의 판결에 복종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사람은 자기에게 대해서 주께서 불의,또는 불공평하다고 말할수 없다고 한다.왜냐하면 하나님앞에서 인간은 잃어버린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의 거부에 대해서 예나 아니오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19)그러므로 이중예정은 사변적 논의를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가 복종으로 받아야 하는 놀랍고 신비스로운 어떤 것으로 남아있다.

2.1.2.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자기 백성을 삼기 원하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합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정하셨기에 그리스도는 우리가 택함 받음을 바로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자신을 속임없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거울이 되신다.따라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있다면.그것은 생명책(계21:27)안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는 분명한 증거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20) 이와 같이 만일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와 교통한다면,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양자로 선택되었다는 확고한 증거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만일 모든 자들이 이미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되어 생명으로 결정되었다면,그리고 만일 우리가 믿음안에서 그를 맞아드리이고 붙잡는다면,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며 우리의 선택의 담보는 주어졌다고 말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주장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있다.21)

2.1.2.5 선택과 구원
칼빈은 인간의 구원은 동기 뿐만 아니라 결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믿었다.따라서 구원의 길인 선택의 예정,부르심,믿음,칭의,중생,성화 그리고 영화의 모든 단계를 하나님의 주권하에 둔다.
선택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하여 확실시 된다.선택된 자들은 결국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무리속에 합쳐진다.이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그리고 부름을 받은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마22:14)는 말씀을 두가지고 해석한다.
즉 보편적인 부르심이란 것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외면적인 말씀의 전파라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꼭 같이 자기에게로 부르신다.이와는 달리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서 하나님은 이것을 선택되어 진정으로 믿는자에게만 주신다.전파된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 뿌리박게 하기 위한 심령의 내면적인 조명을 실현하는 경우이다.22)
또한 성화에 있어서 칼빈은 실천적 삼단논법을 말한다.1)선택된 사람들은 기독론적인 열매를 맺는다.2)그런데 나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3)고로 나도 열매를 맺어야 구원받은 자이다.성도들은 그들의 행함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이요,이로부터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부름을 입었다는 표로 보고 여기서부터 그들의 선택을 깨닫게 된다.선자들의 선행을 하나님의 선함을 깨달을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로 또한 그들의 선택받음을 깨달을 수 있는 증거로 간주한다.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2.1.3 하나님의 주권적 이중예정과 인간의 노예의지
칼빈은 예정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최대한 접근하여 전개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과 은혜의 교리로서 전개했다.그는 이중예정의 문제를 성서가 말하는데로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데에서 침묵한다는 표현과 함께 설명한다.그러나 선택된 자의 궁극적인 구원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올수 있다.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구원의 길>에 들어섰던 자가 중간에 타락한 경우를 성서나 교회사속에서 볼수 있는데,이런 사람이 칼빈에 의하면 본래부터 구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인가? 아니면 선택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칼빈은 적어도 하나님의 그리스도안에서 선택과 유기의 주권적 예정은 성서적으로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중예정의 확실한 기초를 세웠다.위의 질문에 대해 그의 답변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예정앞에서의 인간의 의지란 노예의지일 뿐이다.이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이 구원에 관한 한 완전히 능력을 상실했음을 밝힌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노예의지>라고 불렀다.그가 명백히 고백하기를 ‘인간의 의지는 성령이 없이는 그것이 속박자요,구속자인 정욕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아니다.’라고 했다.또 그는 ‘인간을 자유의지로 잘못 사용하여서 자신도 잃고 자기의지도 잃고 말았다.’고 했고 또 ‘자유의지’는 노예로 포로당하였으므로 의를 위하여 무엇을 하라고 할 힘도 없다.‘고 했다.23)칼빈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초자연적 은사는 박탈당하였고 자연적 은사 역시 부패되었다고 말한다.“실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로 부터 취한 공통적인 의견 즉 자연적 천품들은 죄 때문에 부패되었고,초자연적 천품들은 제거되었다는 견해에 동의한다.이로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추방당하여 영혼의 축복된 생활에 속한 모든 자질이 소멸되어 버려 중생의 은총을 통해서만 그것들을 회복할수 있게 됐다는 말이 된다.이것들 중에는 신앙과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성결을 위한 결실들이 있다.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회복해준 것이기 때문에 외부로 부터 부여받은 첨가적인 것‘이요,’자연을 넘은 것‘들이라고 보야야 한다.따라서 그것들은 제거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다른 한편 정신의 건전함과 심정의 공정도 동시에 떠나버린 것이다.이것이 곧 자연적 은사의 부패를 말하는 것이다.따라서 의지의 부패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이와같이 칼빈은 인간의 의지의 부패를 주장하였다.범죄한 인간의 의지는 무능력 그것이다.따라서 인간은 지성 뿐만 아니라 의지의 완전한 재생을 필요로 한다. 24)
따라서 구원 전체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인간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이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어떤사람은 선택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유기로 예정하셨다.그러나 선택된 자와 자신의 신앙이나 행위에 의해서 된 것이 아이다.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을 받은 자가 부르심을 받기까지 그의 자유의지는 노예의지와 같다. 구원에 관한한 인간의 의지는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2.1.4 선택된 자의 자유
2.1.4.1 선택의 증거의 문제
칼빈은 부르심을 받았다해서 곧 선택된 자라는 것을 거부한다.곧 부름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마 22:14)는 말씀을 보편적 부르심과 특별한 부르심으로 나눈다.따라서 부르심을 가지고는 선택의 증거로 삼을 수는 있으나 완전한 증거가 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자느 <선택된 자>로,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유기된 자>로 본 것이다.이것은 알곡과 쭉정이 비유(마3:12),“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12).”등 선택된 자들에게도 자유가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의 말씀으로도 입증된다.
따라서 선택된 자로서 인정할만한 증거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시적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2.1.4.2 선택된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안에서의 “선택의자유”
칼빈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만이 선울 우구할 수 있게 된다고 하낟.성령의 역사하심이 선을 추구하는 의지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은총이 선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25)
이러한 칼빈의 논증들은 최소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중생한 자는 그의지력이 선울 추구하는 정도까지는 회복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의지의 성격상 선과 악을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는 새로운 은총이 없이도 구원된다는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임은 물론,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와도 다르다.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이중예정을 전제하지 안고 누구에게나 원하는 자에게 선행 은총이 주어진다고 한다.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선택받은 자의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은혜 안에 있는 자에게 허용되는 것으로서,계속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자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장하게 하실수도 있고 그 은혜를 거부할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결론
3.1 자유의지논쟁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담과 화와에게 주어진사실에 대하여는 기독교계에 별 다른 이견이 없다.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 아담에게 있었던 자유의지가 손상을 입었는가에 대하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논의가 분분하다.
정통적 기독교 입장에서는 어거스틴의 인간의지의 무능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의지가 죄에 예속화 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항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견해를 발표했다.그러나 어거스틴의 입장에 섰음에도 의지의 노예화나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하여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거스틴의 주장에 반대를 표명하고 나섬으로써 반펠라기우스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논쟁을 통해 어거스틴의 과격한 주장이 완화되고 수정되어 타락 이전의 인간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주어졌고,타락 후에는 자유의지가 손상되어 구원에 이르는 종교적 선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견해를 교회에서 채택하게 된다.타락한 다음의 아담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이 된 모든 인류는 자기 자신의 의지나 선행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교리를 확립하게 된다.
한편 어거스틴의 절대예정에 관한 교리나 불가항력적 은총의 교리는 반펠라기우스논쟁을 통하여 수정되었고 극단적 운명론에 기울어질뻔 했던 위험이 극복되었다.그러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지의 선용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있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웨슬리신학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편에서는 예정하신 구원의 계확을 성취해가시지만,인간의 편에서는 인간이 해야할 책임을 다해 전도해야 할 것이다.이미 구원을 얻은 성도라고 해도 교만하거나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다해 거룩하게 살려는 도덕적 노력을 계속하고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